소네 아라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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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네 아라스케는 일본 제국의 정치인으로, 하기 번의 가로 시시도 준페이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보신 전쟁에 참전하고 프랑스 유학 후 육군성에서 근무했으며, 메이지 시대에 여러 요직을 거쳤다. 내각 기록국장, 중의원 서기관장, 주 프랑스 공사, 법무대신, 농상무대신, 재무대신 등을 역임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의 뒤를 이어 대한제국 통감에 임명되었으며, 한국 병합에 반대했으나 결국 동의했다. 통감 재직 중 1910년 병으로 사임하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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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 아라스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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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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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자작 |
휘 | 정2위 |
출생일 | 1849년 2월 20일 |
출생지 | 일본 야마구치현 |
사망일 | 1910년 9월 13일 |
국적 | 일본 |
본명 | 曾禰 荒助 |
로마자 표기 | Sone Arasuke |
직업 | |
직업 | 정치인, 외교관, 각료 |
주요 활동 | 한국통감부 통감 |
경력 | |
초대 한국 부통감 | 1907년 9월 21일 ~ 1909년 6월 14일 |
제2대 한국 통감 | 1909년 6월 14일 ~ 1910년 5월 30일 |
제10대 대장대신 | 1901년 6월 2일 ~ 1906년 1월 7일 |
제13대 체신대신 (겸임) | 1903년 7월 17일 ~ 1903년 9월 22일 |
제16대 농상무대신 | 1898년 11월 8일 ~ 1900년 10월 19일 |
제7대 사법대신 | 1898년 1월 12일 ~ 1898년 6월 30일 |
귀족원 의원 | 1900년 9월 26일 ~ 1906년 5월 17일 |
중의원 의원 | 1892년 5월 6일 ~ 1893년 12월 30일 |
추밀고문관 | 1906년 ~ 1910년 |
가족 | |
배우자 | 소네 테루코 |
자녀 | 요시카와 히로지 (차남) |
훈장 | |
훈장 |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
2. 생애
소네 아라스케는 하기 번의 가로였던 시시도 준페이의 삼남으로 태어나, 후에 소네 가문의 양자가 되었다. 보신 전쟁에 존왕파로 참전했고, 프랑스 유학 후 1890년대 초 중의원 서기관장이 되었다. 1892년 일본 총선에서 당선되어 중의원 부의장을 역임하고, 1893년 주프랑스 공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사법대신, 농상무대신, 재무대신 등을 역임하고, 1900년부터 귀족원 칙선 의원을 지냈다.[41]
러일 전쟁 당시에는 다카하시 고레키요 등의 도움을 받아 전비 조달을 위한 해외 차관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1]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귀족원 의원으로 임명되었고, 화족 제도에 따라 남작(1902년) 및 자작(1907년) 작위를 받았다. 1906년에는 칙임평의회 의원이 되었다.
1906년 추밀고문관, 대한제국 부통감을 거쳐 1909년 이토 히로부미의 후임으로 대한제국 통감에 임명되었다.[41] 통감 재직 중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소네는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를 체결하여 순종 황제의 실권을 탈취하였다.
소네는 한국 병합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3] 1910년 5월 30일 위암[8]으로 인해 조선 통감 직위를 사직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해 9월 13일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였으며, 병상에서 한국 병합 소식을 들었다고 전해진다.[41] 향년 62세. 묘소는 아오야마 묘원(1로12-28)에 있다.
2. 1. 초기 생애 및 프랑스 유학
조슈 번의 가로였던 시시도 준페이의 삼남으로 태어났으며, 후에 소네 다카히사의 양자가 되었다. 보신 전쟁에는 존왕파로 참전하였고, 프랑스에 유학하여 공부했다.[41]나가토 국 조슈 번(현재의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양부는 하기 출신의 사무라이였다. 그는 보신 전쟁에서 막부군에 맞서 싸웠다.[41]
메이지 유신 이후, 소네는 유학을 위해 프랑스로 파견되었고, 귀국 후에는 육군성에서 근무했다. 이후 내각관보국장, 내각입법국장 등을 역임하였다.[41]
통칭은 간자부로이다. 소네 쇼조 타카나오의 양자가 되어 소네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17세에 가로 격의 집안 덕분에 장주번 병사의 소대장으로 보신전쟁 초기에 종군했다. 메이지 유신 후, 메이지 원년(1868년), 메이지 정부에 출사를 명받아 항복병 단속에 임했다. 메이지 5년(1872년), 프랑스 유학을 명받아 5년 후 귀국했다. 메이지 12년(1879년), 육군성 근무. 이듬해부터 육군사관학교 근무를 겸했다.
메이지 14년(1881년)에 태정관 서기관으로 전직하여, 메이지 19년(1886년) 4월 내각기록국장, 메이지 23년(1890년)에 초대 중의원 서기관장에 임명되었다.
2. 2. 정계 입문 및 활동
아라스케는 하기 번의 가로였던 시시도 준페이의 삼남으로 태어났으며, 후에 소네 다카히사의 양자가 되었다. 보신 전쟁에는 존왕파로 참전하였고, 프랑스에 유학하여 공부했다.[41]1890년대 초 중의원 서기관장이 되었고 1892년 일본 총선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 중의원 부의장에 올랐으며 1893년 주 프랑스 공사에 임명되었다.[41] 사법상, 농상무상, 일본 대장성 장상 등을 역임하였고 1900년부터 귀족원 칙선 의원을 지냈다.[41]
메이지 유신 이후, 소네는 유학을 위해 프랑스로 파견되었고, 귀국 후에는 육군성에서 근무했다. 이후 내각관보국장, 내각입법국장 등을 역임하였고, 1890년에는 제1회 국회의 첫 번째 중의원 의장 비서관이 되었다.
그는 여러 내각직을 역임했다. 제3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서는 법무대신, 제2차 야마가타 아리토모 내각에서는 농상무대신, 제1차 카쓰라 다로 내각에서는 재무대신 등을 역임했다.
러일 전쟁 당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등의 도움을 받아 전비를 조달하기 위한 해외 차관을 확보했다.[1] 1900년에는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귀족원 의원으로 임명되었고, 1902년에는 화족 제도에 따라 남작(단작)이 되었다. 1906년에는 칙임평의회 의원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자작(시작)으로 승격되었다.
17세에 가로 격의 집안 덕분에 장주번 병사의 소대장으로 보신전쟁 초기에 종군했다. 메이지유신 후, 메이지 원년(1868년), 메이지 정부에 출사를 명받아 항복병 단속에 임했다. 메이지 5년(1872년), 프랑스 유학을 명받아 5년 후 귀국했다. 메이지 12년(1879년), 육군성 근무. 이듬해부터 육군사관학교 근무를 겸했다.
메이지 14년(1881년)에 태정관 서기관으로 전직하여, 메이지 19년(1886년) 4월 내각기록국장, 메이지 23년(1890년)에 초대 중의원 서기관장에 임명되었다. 이 직책을 2기 역임한 후, 제1차 마쓰가타 내각의 해산에 따라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야마구치 4구에서 초선을 거두었다. 당파는 시나가와 야지로가 주재한 국민협회에 속했지만, 메이지 26년(1893년)에 주프랑스 전권공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일청전쟁 후에는 주독일 전권공사 아오키 슈조와 함께 삼국간섭에서 열강에 곤경에 처했다.
메이지 31년(1898년)에 제3차 이토 내각이 발족하자 사법대신에 취임했다. 이후, 농상무대신, 대장대신, 외무대신 등을 역임했다. 특히 일러전쟁 때는 외채 부족으로 고심했지만, 대장대신으로서 큰 역할을 수행했다.
2. 3. 대한제국 통감 시절
1906년 추밀고문관을 거쳐 대한제국 부통감을 역임했고,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안중근(安重根)에게 하얼빈에서 암살당한 후 그의 후임으로 대한제국 통감이 되었다.[41]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를 체결하여 순종 황제의 실권을 탈취하였다.소네는 한국 병합에 반대했으나,[3] 1910년 5월 30일 병으로 통감 직위를 사직하고 일본으로 귀국하여 요양하다가 그 해 9월 13일 사망하였다.[3]
2. 4. 사망
1910년 5월 30일 병으로 조선 통감 직위를 사직하고 일본으로 귀국하여 요양하다가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그 해 9월 13일 사망하였다.[41] 소네는 한국 병합에 반대했으나,[3] 위암[8]으로 통감직을 사임했지만, 병합 완료 소식을 병상에서 듣고 훙거했다. 향년 62세. 묘소는 아오야마 묘원(1로12-28)에 있다.3. 평가
소네 아라스케는 외교, 내정, 재정은 물론 한국 문제까지 폭넓게 다룬 정치가였지만, '2류 정치인'으로 불리며 조슈 번 출신 유력 정치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팔방미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9]
프랑스 공사 시절에는 공사관 방에 틀어박혀 아침부터 저녁까지 화투만 쳤기 때문에 "화투 공사"라는 별명이 붙었다.[10]
흑암루향(黒岩涙香)에 따르면, 1898년 당시 10대 애인 두 명을 두고 있었다. 17세의 다나카 이네(田中いね)를 하녀 겸 첩으로 고용하여 재직 중에는 함께 관저에 숙박했고, 일요일마다 아카사카 다이마치(赤坂台町) 자택에 데리고 돌아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동시에 미쓰무사(三十軒堀)의 하나미쓰(花三升) 꽃가게의 19세 여성인 하나카(花香)의 집에도 자주 드나들었다.[11] 1909년경에는 경주에서 석굴암 오층석탑을 가져갔다.
4. 기타
소네 아라스케는 외교, 내정, 재정은 물론 한국 문제까지 폭넓게 다룬 다재다능한 정치가였으나, 2류 정치인으로 불렸다. 장주파의 실력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팔방미인"이라는 별명도 얻었다.[9]
프랑스 공사 시절에는 공사관 방에 틀어박혀 아침부터 저녁까지 화투만 쳤기 때문에 "화투 공사"라는 별명이 붙었다.[10]
구로이와 루이코(黒岩涙香)에 따르면, 1898년 당시 10대 애인 두 명을 두고 있었다. 한 명은 17세의 다나카 이네(田中いね)로 하녀 겸 첩으로 고용하여 재직 중에는 이네와 함께 관저에 숙박했고, 일요일마다 아카사카(赤坂) 다이마치(台町) 자택에 이네를 데리고 돌아가는 것이 일상이었으며, 그와 동시에 미쓰무사(三十軒堀)의 하나미쓰(花三升) 꽃가게의 19세 여성인 하나카(花香)의 집에도 자주 드나들었다.[11] 1909년경에는 조선 경주에서 석굴암 오층석탑을 가져갔다.
1911년, 에노시마의 류노가오카(龍野ヶ岡)(최근에는 연인의 언덕으로 불린다)에 당시 수상(首相) 가쓰라 다로의 전각(篆額)으로 "세이코 소네 균비(西湖曾禰君碑)"[12]라는 거대한 헌장비(顕彰碑)가 세워졌다. 이는 소네의 별장(別荘)이 가타세(片瀬)(후지사와시)에 있었기 때문이다. 찬문(撰文)은 미시마 다케시, 서(書)는 다카시마 규호이다.[13] 참고로, 이 비석에는 1923년 9월 1일의 간토 대지진으로 파손되어 다음 해 11월에 수리했다고 새겨져 있다.
5. 연표
- 1889년 7월 23일 - 내각기록국장 겸임, 奏任관 1등 서임[14]
- 1890년 - 초대 중의원 서기관장
- 1892년 - 제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선, 중의원 부의장
- 1893년 - 주불(駐佛) 공사
- 제3차 이토 내각 사법대신, 제2차 야마가타 내각 농상무대신, 제1차 가쓰라 내각 재정대신
- 1900년 9월 26일 - 귀족원 칙선의원[15]
- 1902년 - 남작
- 1906년 - 추밀고문관, 5월 17일 귀족원 칙선의원 사직[16]
- 1907년 9월 21일 - 자작, 대한제국 부통감[17]
- 1909년 6월 14일 - 한국통감[18]
- 1910년 9월 13일 - 훙거
6. 영전
소네 아라스케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계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1892년 일본 총선에서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 같은 해 중의원 부의장을 지냈다. 1893년 주프랑스 일본 대사로 불평등 조약 개정 협상에 참여했다.[1]
이후 여러 내각에서 법무대신, 농상무대신, 재무대신 등을 역임했다. 러일 전쟁 당시에는 전비 조달에 힘썼으며, 1900년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귀족원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1902년 화족 제도에 따라 남작, 1906년 칙임평의회 의원을 거쳐 1907년 자작으로 승격되었다.[1]
1907년 한국 부총리, 1909년 한국 통감으로 한국의 전화망 구축 사업을 추진했다.[2] 그는 한국 병합에 반대했으나, 1910년 건강 문제로 사임했다.[3]
6. 1. 계급
수여 날짜 | 계급 |
---|---|
1881년 8월 30일 | 종육위[19] |
1881년 11월 26일 | 정육위[19] |
1886년 7월 8일 | 종오위[19][20] |
1890년 6월 11일 | 종사위[19][21] |
1897년 2월 15일 | 정사위[19][22] |
1898년 2월 14일 | 정삼위[19][23] |
1904년 4월 20일 | 종이위[19][24] |
1910년 8월 29일 | 정이위[25] |
6. 2. 훈장 등

연도 | 수여 내용 |
---|---|
1889년(메이지 22년) | |
1890년(메이지 23년) 12월 26일 | 훈오등 녹보장[19][28] |
1891년(메이지 24년) 3월 18일 | 훈사등 욱일소수장[19][29] |
1894년(메이지 27년) 6월 19일 | 훈삼등 녹보장[19][30] |
1898년(메이지 31년) 4월 6일 | 훈이등 욱일중광장[19][31] |
1901년(메이지 34년) 10월 21일 | 금배일조[19] |
1902년(메이지 35년) | |
1906년(메이지 39년) 4월 1일 | 욱일대수장[19][34]・메이지 삼십칠팔년 종군기장[35] |
1907년(메이지 40년) 9월 21일 | 자작[19][36] |
1909년(메이지 42년) 4월 18일 | 황태자도한기념장[37] |
1910년(메이지 43년) 8월 29일 | 욱일동화대수장[25] |
; 외국 훈장 수여 허가
연도 | 수여 내용 |
---|---|
1897년(메이지 30년) | |
1898년(메이지 31년) 9월 20일 | 포르투갈 왕국: 빌라 비소사 무염의 성모 기사단 훈장 그랑크루스[19] |
1902년(메이지 35년) 3월 12일 | 대청제국: 1등 3등급 쌍룡보성[19] |
1908년(메이지 41년) 3월 12일 | 대한제국: 이화대훈장[38] |
1909년(메이지 42년) | |
1910년(메이지 43년) 4월 14일 | 대한제국: 황제폐하 남서순행기념장[40] |
6. 3. 외국 훈장 수여 허가
훈장 | 수여 국가 | 수여 날짜 |
---|---|---|
Légion d'honneur|레지옹 도뇌르 훈장프랑스어 그랑트피시에[19] | 프랑스 공화국 | 1897년 5월 20일 |
이사벨라 가톨리카 훈장 1등 훈장[19] | 스페인 제국 | 1897년 10월 6일 |
빌라 비소사 무염의 성모 기사단 훈장 그랑크루스[19] | 포르투갈 왕국 | 1898년 9월 20일 |
1등 3등급 쌍룡보성[19] | 대청제국 | 1902년 3월 12일 |
이화대훈장[38] | 대한제국 | 1908년 3월 12일 |
서성대수장[39] | 대한제국 | 1909년 11월 15일 |
훈일등 서봉장[39] | 대한제국 | 1909년 11월 15일 (소네 미츠코) |
황제폐하 남서순행기념장[40] | 대한제국 | 1910년 4월 14일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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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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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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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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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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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1909-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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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曾禰荒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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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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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1886-07-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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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1890-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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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1897-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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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1898-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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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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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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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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